<회고록>
타인과의 관계에 서툴다. 내가 타인에게 상처를 줄까 두렵고 동시에 내가 타인에게 상처 받을까 겁이 난다. 낯선 사람과의 처음은 더욱 어렵다. 어떤 말을 건네고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잘 모르겠다. 교육봉사를 처음 시작하면서 가장 고민했던 것도 바로 ‘내가 잘 가르칠 수 있을까?’보다 ‘내가 아이와 친해질 수 있을까?’에 관한 문제였다. 다행히 아이들은 금방 마음의 문을 열어주었다. 그런 아이들에게 나도 정을 주었고, 교육봉사는 어느덧 나에게도 즐겁고 의미 있는 시간이 되었다. 그래서 조금은 자만했던 것 같다. 경험이 많으니까 이번에도 잘해낼 거라고. 초등학생은 물론이고 고등학생, 심지어는 특수학습자와도 교육봉사 경험이 있었는데, 중학생은 처음이었다. 센터에서는 아이가 그 무섭다는 ‘중2’를 지나는 중이라 가끔 반항도 하고 말수가 줄었다고 했다. 중2병이라는 단어는 누가 만들었는지, 원래 그 시기의 아이들은 그럴 수밖에 없고 그러는 게 당연한데. 아이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주고 싶었고, 아이와 친해지고 싶었다. 그 시기의 고민들은 대개 부모님께는 절대 말할 수 없는 것들이고 친구들과는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이라, 내가 아이의 대나무 숲이 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. 그래도 나와 같은 여자아이니까 공감대를 쉽게 형성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. 어느새 내 고민은 ‘영어 손 놓은 지 오래인데, 내가 잘 가르칠 수 있겠지?’쪽으로 기울어 있었다.
그러나 아이는 정말 말이 없었다. 내가 어떤 말을 해도 그 흔한 고갯짓 한 번이 없어 반응을 가늠하기 어려웠고, 질문을 해도 대답은 늘 단답형이었다. 그것이 기분 나빴던 것은 아닌데, 덩달아 나도 조심스러워졌다. 괜히 내가 아이에게 말을 거는 것이 아이를 성가시게 할까봐, 아이의 감정을 상하게 할까봐. 영어 수업을 진행할 때도 아이의 반응을 읽을 수가 없으니까 별 게 다 고민스러웠다. 괜히 내가 자세하게 설명하면 아이가 이미 다 아는 내용인데 저를 무시한다고 생각할까봐 조심스러웠고 다른 부분으로 훌쩍 넘어가 버리면 자기가 선생님이 설명도 안 하는 쉬운 부분을 모른다고 자책할까봐 조심스러웠다. 그렇게 아이와의 시간은 늘 나에게 마음의 짐이 되었고, 대나무 숲은커녕 나는 아이에게 그 무엇도 되어주지 못했다. 그렇게 반년이 흘렀는데도 아이와의 관계는 변한 게 없었다. 그 사이 나는 마음이 불편하면서도 내 학업이 바빠 아이와의 수업에 소홀할 때가 많았고, 서로 별 말을 나누지 않는 아이와의 관계에 익숙해진 것도 같았다. ‘아이가 말이 없는데 어떡해.’와 같은 무책임한 합리화를 하면서.
교육봉사 시간을 채웠는데도 아이와의 수업을 계속하는 건 일종의 책임감이었다. 그래서 매번 ‘오늘은 센터 가면 눈 딱 감고 살갑게 굴어야지. 일주일 동안 뭐 했는지도 물어보고.’를 속으로 외치며 수업을 향했다. 그러나 막상 아이를 마주할 때면 나도 낯을 가리고 말았고, 여전히 나는 아이의 사소한 관심사도 잘 모르는 무책임한 어른이었다. 그러다 어느 날 센터장님께서 내게 “쟤가 요새 부모님 말도 잘 안 듣는데, 그나마 선생님이랑 공부한다고 꼬박꼬박 오는 걸 보면 다행이에요.”라고 말씀하셨고, 그 말이 나를 쿡쿡 찔렀다. 어쩌면 아이는 이미 나에게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주었는데 내가 그걸 미처 알아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는 미안함. 어쩌면 우리가 3월의 그 시간에 멈춰 있는 이유는 다 나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죄책감. 아이에게 미안했다. 그럼에도 여전히 나는 잘 모르겠다. 내가 아이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.
이 글은 무책임했던 지난날에 대한 회고인 동시에 그 답을 꼭 찾겠다는 나의 서투른 다짐이다. 혹시라도 다음에 아이와 나에 대한 글을 또 실을 수 있다면, 그때는 아이와 만든 추억을 소개하고 싶다. 내가 어떻게 답을 찾았는지, 내가 찾은 답은 무엇인지. 나란히 서서 손을 잡은 아이와 나의 모습을 기쁜 마음으로 써 내려가고 싶다.
[출처] 에디플러스 1팀 윤소영 기자